목록으로

성경과 신학

불신자에게도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서 죽으셨다’라고 말해도 될까?
by Justin Dillehay2024-04-11

이 글 제목을 보고 의아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당연하지요. 그게 아니면 어떻게 복음을 전한다는 말이에요?” 이렇게 말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일반 속죄(general atonement,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었다는 교의)를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애초에 지금 제기하는 질문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 문제는 정해진 또는 제한된 속죄를 믿는 그리스도인에게만 해당한다.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란 예수님의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게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의 구원은 아버지께서 미리 그에게 주신, 나라마다 있는 한정된 (그러나 아주 많은) 숫자의 죄인에게만 해당한다(요 6:38-39). 이 견해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해서 구원받은 사람은 그 누구라도 최후의 심판에서 정죄를 받지 않는다(롬 8:34). 그리스도가 대신해서 죽은 모든 사람은 궁극적으로 구원을 얻는다(롬 5:10).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에게 주시지 않았다(요 17:9)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결코 모든 사람을 위한 게 아님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죽은 건 그의 양을 위해서이고, 모든 사람이 다 그의 양은 아니다(요 10:11, 26). 예수님은 신부를 위해 죽었지만, 모든 사람이 다 그의 신부는 아니다(엡 5:25; 계 19:7-8). 구원받는 믿음의 증거 없이는 예수님의 양이 누구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따라서 지금 불신자에게 “예수께서 당신을 위해 죽으셨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질문이 제기된다. 우리는 여기에 관해서 어떻게 확실히 알 수 있을까?


까다로운 질문


솔직하게 고백하면, 나는 제한 속죄를 고수하는 목사이다. 나는 방금 요약한 주장을 믿는다. 더 나아가 나는 설교할 때나 개인적인 대화에서나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 죽으셨습니다”라고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이게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 까다로운 질문이라는 사실을 잘 안다. 하나님의 선택을 직접 언급하지 않고도 복음 전파가 가능하겠지만, 믿지 않는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예 이야기하지 않고 복음을 전파하는 건 쉽지 않다(고전 15:1-3; 딤전 1:15; 벧전 3:18). 그러므로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다는 믿지 않는 죄인이 누구인데요?”라는 질문이 나오는 건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우리 모두와 관련이 있다. 따라서 누군가는 “속죄에 당신이 포함되지 않는다면, 그걸 확신하지 못한다면, 그런 속죄가 당신에게 무슨 소용이 있나요?”라고 물을 수도 있다.


이것이 아마도 내가 읽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제목에서 제시한 질문에 대해서 단호하게 “안 된다”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거의 없고, 보통은 “안 된다. 하지만”(또는 심지어 “괜찮다. 하지만”)과 같은 식으로 대답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전도할 때 이 특정 문장을 사용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모두에게 조언을 제공함으로써 이 실질적인 문제를 다루려고 한다.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서 죽으셨다”를 전도할 때 사용하는 경우


먼저, 이 문장을 성경의 가르침보다 더 대단하게 취급하고 있는지를 스스로 확인하라. 예를 들어, 사도행전 속 그 어떤 전도 설교에도 이런 구절이 들어간 사례가 없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베드로와 바울이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 죽으셨습니다”라고 말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전도할 수 있었다면, 이 문장을 정통 복음의 리트머스 시험지로 삼아서는 안 된다. 


둘째, 분명히 회개하고 믿을 때까지는 결코 구원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불신자에게 확실하게 알려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대부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비그리스도인도 그렇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예수께서 당신을 위해 죽으셨습니다”라는 말 때문에 불신자가 자신의 죄와 불신앙에 대해서까지도 안정감을 느낀다면, 그 결과는 심각하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너희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 13:3, 5)라고 상기시키셨다. 


마지막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은 물론 하나님의 진노까지 느끼도록 도와야 한다. 놀랍게도 나는 어떤 전도하는 사람이 불신자에게 “하나님은 결코 당신에게 진노하지 않으십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요한일서 2:2이 그리스도를 “화목 제물 (즉, 진노를 없애는 희생)”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 그리고 그 제물은 온 세상의 죄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라고 설명을 이어갔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제 더 이상 누구에게도 진노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요한복음 3:36의 “아들을 믿는 사람에게는 영생이 있다. 아들에게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생명을 얻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를 산다”와 완전히 모순된다. 


믿기 전까지 하나님은 여전히 불신자를 향해서 진노하신다. 사실상, 그분의 사랑이 단순한 감상적 사랑으로 그치지 않는 이유가 바로 하나님의 진노 때문이다.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서 죽으셨다”를 전도할 때 사용하지 않는 경우


첫째, 그 말을 하면서 전도하는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화내지 말라. 비록 그들이 제한 속죄는 믿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건 사실상 이런 의미이다. “예수께서 죽으신 건 당신이 그를 믿고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에는 당신도 동의하지 않는가? 


둘째, 언어 사용에 있어서 사도들보다 더 조심해서는 안 된다. 당신이 성경보다 더 신중하다면, 칼뱅주의야말로 전도를 죽인다는 혹자의 우려를 정당화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베드로와 바울이 불신자에게 “예수께서 너희를 위해 죽으셨다”라고 말하지 않은 건 맞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전도를 하면서 그와 비슷한 호소를 아예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 “이 약속은 여러분에게 주신 것입니다”(즉, 성령의 약속과 죄 사함의 약속)(사도행전 2:39).


· “하나님께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악에서 돌아서게 하셔서, 여러분에게 복을 내려주시려고 …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3:26).


·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는다”(10:43).


· “주 예수를 믿으십시오. 그리하면  그대가[단수]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16:31).


그러므로 비록 “알미니우스주의”처럼 들리더라도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사실상 찰스 스펄전만큼 제한 속죄를 확고하게 받아들인 설교자는 거의 없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불신자를 향해 무척 자유롭게 언어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그는 하이퍼 칼뱅주의자들로부터 자주 공격받았다. 그것은 스펄전의 목표가 결코 강성 칼뱅주의자들의 기분을 맞춰주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바란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노만이 아니라 사랑까지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라. 복음은 경고인 동시에 구애이다. 젊은 개혁파 설교자들로부터 불신자에게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신다고 말해도 괜찮냐는 질문은 받은 D. A. 카슨은 이렇게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나는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신다고 말합니다.” 이안 머레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것은 사실이다.) … 성령께서는 진리를 사용하여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신다. … 그러나 죄를 깨닫는 것만으로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데 충분하지 않다. 죄에 대한 확신은 단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말할 뿐, 죄인에게 하나님의 용서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 그것을 위해서는 더 많은 진실이 필요하다. 죄인에게 하나님께서 용서하실 준비와 의지가 있음을 확신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길뿐이다. … 사랑은 큰 매력이다. 복음을 호소하는 데에 있어서 사랑은 가장 중요하다. … 그리고 이 사랑은 누군가가 택함을 받았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우리 모두 죄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언제나 ‘좋은 소식’으로 선포되어야 한다.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결과이다. 그렇기에 사람을 회개의 자리로 이끌 수 있다(롬 2:4). 


제한 속죄는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의 부정이 아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더 분명하게 인식함으로 그 사랑을 더욱 심화시킨다. 남자가 아내를 특별하게 사랑하면서 모든 여자를 사랑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하는 것처럼, 예수님도 신부를 독특하게 사랑하면서도 모든 사람을 동시에 사랑하실 수 있다(막 10:21 참조). 이것이 바로 에베소서 5:25의 분명한 메시지이다. 제한 속죄의 복음은 예수님이 신부를 위해서 특별한 방법으로 죽으셨지만, 그 후 우리를 향해 돌아서서 모든 사람을 그 관계로 초대하신다고 말한다. “성령과 신부가 ‘오십시오!’  하고 말씀하십니다”(계 22:17). 우리가 그런 열정으로 복음을 전하는데도 예수님께서 정말로 나를 위해서 죽으셨나 하면서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출처: Can I Tell an Unbeliever ‘Jesus Died for You’?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카카오톡으로 보내기
  • 공유하기
  • 공유하기